연안이씨 가계 연구 2017 한국에서 연안이씨에 대한 연구는 족보의 서문에 나타난 일부 기록외에는 찾기힘든 상태이다. 이로서 시족의 역사가 이미 2017년을 기준으로 볼때, 시조공(李茂)께서 동래하신지 서기 660년부터 기산(起算), 1354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근원(根源)조차 찾지 못한 것은 자손된 십여만의 후손들에게도 심히 부끄럽다. 동이민족(東夷民族)은 중국 중심 역사기록에 대해 다소 저항의식이 있고, 지금도 자주정신에 입각할 때 이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이글을 쓰는 이관희 본인도 같다. 그러나 역사는 유. 불리를 따져 왜곡되어서는 안되므로 중국역사속에서 일부를 부득히 이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중국에서 시작되고 있는 세계이씨를 표방하고 단결하자는 최근의 추세에 비춰 볼때,우리가 어차피 이씨이고, 특히 중국의 롱서(隴西)를 기반으로 한 중국이씨에 근간과 같은 이상,한국의 뭇 이씨와 다르나는 점은 무시 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의 1억 6천만명의 이씨가 "근원동이(根源東夷")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볼 때,그들이 동이(東夷)라는 종족의 뿌리를 스스로 인정하려한다는 것은 다행하다. 따라서 시조공(李茂)께서 중국에서 이땅에 오셨을 때 가장 먼저 이(李)라는 성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한국역사에서도 확실하게 고증하고 있고, 그 당시 이씨의 성은 중국을 지배하는 당(唐)의 국성이 이씨이고 한국 각 역사서에도 이를 부장하지 않는 상황을 참작한다면 우리는 당의 이씨성을 맨 처음 사용한 이씨임을 입증하고 있다. 아직 시조공이 당의 황족계보상 후손임이 밝혀 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태여 당황실의 계보를 인용하는 것도 앞으로는 고려하여야 할 문제이고, 한편 당의 종실에 같은 일족임은 확실한 증거가 있음으로써 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단 고요(陶皐)를 혈족의 시조로 보는 중국의 성씨, 즉 당황실을 비롯한 모든 중국, 세계의 성시처럼 같은 혈족의 시조로 모셔야 할 것이며, 앞으로 중국의 모든 이씨들과도 같은 혈족으로써 당당함을 갖어야 한다. 아직 당고조의 혈계(血系)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는 이상 성급히 한국의 연안이씨가 당고조의 10자 이원례의 장자인 이무를 시조로 추정은 가능할 지언정 확정하는 것은 고려하여야 할 문제이다. 이부분을 일단 짚어보면서 고요(陶皐)이후 우리 연안이씨도 이씨 성을 갖게 한 성씨의시조 이정(李貞)과 이분의 조상이신 혈족의 시조 고요(陶皐)씨에 대하여도 조상으로 모신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을 갖일 이유가 없다, 뿐 아니라 특히 동양사상의 사상적 시조인 노자(老子 李耳)선생에 대해 당연히 우리의 조상으로 모시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그 본을 배우며 살아나는데 늘 떳떳함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이후에 주요 인물로 활략하신 조상을 살펴 본다.
이광 李廣, Li Kuang - 기원 전 119년)은 중국 전한시대의 장군. 문제, 경제, 무제를 삼 대에 걸쳐 수행하였다. 무용이 뛰어나 평생을 흉노와 싸워왔지만 번번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했다. 진의 명장 이신의 자손이다. 종제로 승상(丞相)이 된 이채(李蔡)가 있다.
위 표에서 연안이씨는 번(翻)의 후손으로 계보되고 당태종은 담(譚)의 후손이라고 보는 인식이 대부분이 였지만,
가장 중요한 년대고증(年代 考證)이 불명확하여 이부분은 재고(再顧)되어야 한다. 중국에서 "李茂"라는 이름의 농서이씨 역사적 인물은 二人이라는 점에서 고찰한다.이는 평백제(平百濟) 당시 西紀 660년에 상당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게 되는 증거이다. 그 중 武昭王 李暠-이 번-이보-後孫 李茂 (장군 432-502)은 생종 연대가 적정하지 못하다. 아래 참고할 가계와 사서로서 입증한다. 李茂(北魏):北魏使持節、侍中、鎮西大將軍、開府儀同三司、并州刺史、敦煌宣公李寶第二子,北魏光祿大夫,西兗州刺史,敦煌恭侯.
다음으로 연대에 부합되는 분으로 西紀 660年 唐高宗孫 李茂를 거론할 수 있다. 사실상, 平百濟때 蘇定方과 같이 海東에 온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다만, 다시 당나라로 뒤돌아 가지 않았다는 사실만 입증된다 해도 가능성은 없지 않다. 당시, 武則天의 횡포에 살아 남기 위하여 뒤돌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西紀660年唐高宗孫 李茂의 생존년대가 나의 玄祖 李茂임을 입증하는대 너무도 부합한다. 서기 660년은 28세의 청년장군으로서 출정이 가능하였을 것이고, 본국에서 출정전에 자녀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중국에 西紀660年唐高宗孫 李茂의 후손이 존재한다면 일부 唐史에서 기술된 내용이 부적절하다고 볼 때, 귀환한 사실여부로서 확인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당은 무측천(武則天)이라는 여제(女帝)가 당의 후손들을 모해하고 제위를 지키던 시기였음과, 자신의 자식들까지 살해한 역사기록에 볼 때, 백제를 평정하고 당나라로 돌아간 소정방(蘇定方)으로서는 자신의 공적을 더욱 과장하기 위하여 동행한 이무(李茂)장군에 대해 바르게 보고하엿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따라서 이무장군이 당나라로 귀환하였을 가능성이 없다. 무측천(武則天)은 자신의 위세를 손상한 이무장군에 대해 더욱 강한 응징을 하고 싶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첨하는 인물들은 강한 매도(罵倒)로 역사에 기록하였을 확신이 드는 부분이다. 뿐 아니라, 이무장군이 당으로 660년에 신라에 머문 시기가 있었음은 확실하고 자손이 없었으리는 확증이 없지 않은한, 이후 귀환하였다 하더라도 당사에 기록된 기록은 모두 660이후에 발생한 기록이고 이 사실이 신라에 존재하는 후손들에게 주는 부분은 사실을 인정하는데 직접적인 의미는 크지 않다고 본다. 또, 해동(海東)에 사는 자손의 위치에서 본다면 먼저 타당한 계보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지 역사적 기록들이 부도덕하였다는 문제를 이유로하여 조상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 꺼려야 할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父, 李元禮有3子,淮南王李茂,淮南公李蕃,汶山公李蓁。 《旧唐書》卷六十四·列传第十四·徐王元礼 《新唐書》卷七十九·列传第四·徐王
아래는 이상을 참고하고자 역사적 배경을 열거한 것이다 .
농서이씨의 주거지 감숙성의 지도이다. 적도(狄道)로 불리는 천수시(天水市)는 황하의 원류로 알려진 신성한 땅으로 알려저 있다.
선대[편집] 증조부 이중상(李仲翔)은 전한의 장군으로, 소창(素昌)[1]에서 강(羌)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다. 이중상의 아들 이백고(李伯考)는 적도로 가 이중상을 장사지냈고, 이때부터 이광의 가문은 적도에 살았다. 적도 狄道 중국북방의지명 , 참조 당의 재상 방현령 전서 권87
비장군[편집] 본적지는 농서군 성기현(현 감숙성 텐수이시 진안현)이다. 기원 전 166년, 흉노 정벌에 공을 세워, 낭이 되어 문제의 옆에서 장군으로 수행했다. 맹수를 사냥을 할 때 근접전에서 죽이는 무용을 보이자 문제는 「고조부 때 태어났으면 만호후(萬户侯)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경제 때는 효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주아부 아래에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다만 양왕 무의 장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후에 상곡 태수, 상군 태수가 되었다. 그 때에 10배가 넘는 흉노군에 포위되었지만, 일부러 복병이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자, 흉노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 후, 농서, 북지, 안문, 운중 태수(모두 한의 북변에서 흉노에게 가깝다)를 역임한다. 당시 흉노들에게 비장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후로도 무용이 뛰어난 무장을 이광을 모방해 비장군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는데, 후한 말기의 무장 여포도 비장군으로 불렸다. 비운의 장군[편집] 한 무제 때는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위위에 승진했다. 무제가 마 읍에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하려고 했을 때에는, 효기장군으로 종군했지만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 전 129년 흉노와의 싸움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죄를 추궁 당해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우북평 태수로 복귀하여, 낭중령으로 옮겼다. 흉노와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좋은 전과를 얻지 못하고, 기원 전 119년 흉노 침공 때에는 고령을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광은 격렬하게 항의해 간신히 참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후방인 익수의 군으로 돌려졌다. 이광은 불복하여 다른 방면에서 진군 했지만, 우연히 길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흉노와의 싸움에 늦어 버렸다. 위청이 그것에 대해서의 보고서를 보내려고 이광의 부하를 힐문하자, 이광은 담담히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위청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을 기회를 가졌지만, 대장군 위청이 나를 후방 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부하 장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남녀노소 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광(李廣)의 자손
이광의 막내 아들 이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위청을 원망하면서, 주연 자리에서 위청을 구타했다. 위청은 불문에 붙였지만, 이것을 안 위청의 조카 곽거병은 원한을 품고 수렵장에서 이감을 사살했다. 이광의 장남 이당호는 무인은 아니었만, 무제의 측근인 한언이라고 하는 신하가 불손한 태도로 대하자, 이당호는 그를 폭행했다. 그 과감함을 본 무제는 그를 유능하다고 평가했지만, 이당호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이능이다. 또 이감은 이초(李椒)라고 하는 둘째 형이 있었지만 그도 맏형과 같이 요절했다. 이감은 두 명의 아이를 두었고, 아들은 이우이며, 인색하고 금전 집착이 강했다. 딸은 이우의 누나로 황태자 류거의 측실이 되어 려태자(류거)에게 신뢰를 받아 그의 시종이 되었다. 하지만 사촌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면서, 그도 이릉의 뒤를 쫓아 흉노로 도망치려 한다는 비방을 받아 사형당했고, 이릉의 처자와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이릉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기》의 저자 사마천도 이릉을 옹호하다 궁형을 당하였다.
일화 이광은 청렴한 인물이며, 샘을 발견하면 부하를 먼저 먹였고 식사도 하사관과 함께 하여, 전원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자신의 몫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복숭아나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과 사람이 모이고 길이 생긴다”고 평가했다.
바위에 꽂힌 화살 이광은 활의 명수이며,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겨냥해 쏘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으며, 이광의 화살은 그 돌에 박혀 있었다. 그 후 이광은 여러번 바위에 화살을 발사했지만 한번도 박히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양자운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자운은 「지성이면 금석도 열린다」(성심성의로 사물을 행하면 바위도 관통할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서경잡기) 소설 수호전의 등장인물로 활의 명수인 화영은 이 일화를 모방해 「소이광」이라고 불린다.
연안이씨 가계 연구 21 서량(西涼)국 창업 , 후한-삼국-서진 이후 5호16국중 하나 이고(李暠, 351년 ~ 417년, 재위:400년 ~ 417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서량의 시조. 자는 현성(玄盛),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소왕(武昭王) 또는 흥성황제(興聖皇帝)라고도 불린다. 농서군의 명문 호족 이감(李弇)의 손자로, 이창(李昶, 자는 중견(中堅)의 막내이다. 조부 이감은 서진 혹은 전연의 양주자사·무위장군·천수군 태수를 맡아 안세정후(安世亭侯)에 봉해져서 이고의 대까지 세습되었다.
생애[편집] 후량 말기 397년에 후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이 돈황(敦煌)을 지배하자 곽황의 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그의 휘하 교곡현령(效穀県令)으로 임명했다. 곧 맹민이 병으로 죽어, 한인 호족으로부터 추대을 받아 이고가 돈황태수가 되었다. 400년 북량의 진창(晋昌)태수 당요(唐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고를 대장군(大将軍)-양공(涼公)-진량2주목(秦涼二州牧)-호강교위(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즉위 후 흉노가 건국한 북량의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짓어 유교을 진흥시켜, 항상 한족문화의 보호에 노력했다. 그러나 이고는 417년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후주(後主) 이흠이 뒤를 계승하였다. 당나라 왕조의 황실 이씨는 그의 자손을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나라 때 성립된 진서에서는 휘을 피하고 자를 이름하여 "이현성(李玄盛)"이라고 기술하였다. 참고로 서량왕 이고(李暠-玄盛)에 대하여 계경필원-최치원이 서주자사에게 보낸 글에서 인용하기를 “ 제가 지난번에 귀성(龜城)을 진수하면서 특별히 성가퀴를 쌓았는데, 이는 대개 천의(天意)에 부응하여 토공(土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순유하시는 행운을 만나 공적을 세웠다는 칭찬을 받게 되었고, 또 어련(御輦)이 오래 머무시는 동안에 공덕비를 세우게까지 하셨습니다. 이는 두원개(杜元凱)가 바야흐로 훈명(勳名)을 부끄러워할 일이요, 이현성(李玄盛)이 감히 덕정(德政)을 말하는 격이니, 비록 공을 세워서 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총애를 얻으면 깜짝 놀라듯 한다는 격언이야 어찌 하겠습니까.상시(常侍)께서는 올곧게 도를 행하면서 남의 선한 점을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멀리 글월을 띄워 과분하게 칭찬하기를, “불후의 미담을 길이 전하면서 미래의 일을 미리 보여 주었으니, 그 아름다움은 〈촉도부(蜀都賦)〉를 압도하고, 그 고상함은〈검각명(劍閣銘)〉과 나란히 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 덕정의 표본으로 일컬었다. 역사[편집] 397년 후량(後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北凉)을 건국했다. 398년단업은 돈황(敦煌)을 장악하자 돈황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교곡현령(效穀縣令)으로 임명했다. 얼마후 맹민이 병사하자, 한인 호족의 추대로 이고가 돈황태수가 되었다. 400년, 북량의 진창태수(晋昌太守) 당요(唐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고를 대장군·양공·진량이주목·호강교위(大将軍涼公秦涼二州牧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북량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짓어 유교을 진흥시켜, 한족문화의 보호에 노력했다. 417년에 이고가 병사하고 이흠(李歆)이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인망이 없었다. 또한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420년 7월, 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서량은 여기서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420년 10월, 이흠의 동생인 관군후(冠軍侯) 이순(李恂)은 돈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를 자칭하여 다시 서량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421년에 저거몽손이 돈황을 점령하여 서량은 완전히 멸망했다. 역대 군주[편집]서량 군주와 연호
자료 수집 2244 이관희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한족인 이고(李暠)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서량(西涼, 400년 ~ 4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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